2007 자연과의 새로운 소통을 위하여

2007 For a New Interaction with Nature

2006 박이소 유작전 '탈속의 코메디'

2006 Art and Plants Growing Together

2006 미술로 자라는 식물 식물로 자라는 미술

2006 독립작가연구회와 신미술문화운동

2006 게하르트 리히터전

2005 To the Nature with body

2005 자연으로 몸으로

2005 이응우의 '바꿔쓰기와 다시보기'

2005 고승현의 '백년의 소리'를 들으며

2004 우무길의 '육면체와 끈 그리고 새로움'에 관하여

2004 이미지로 포장된 사물의 해방-김희곤 개인전

2003 작업실 운동을 위하여

 

 

 

자연과의 새로운 소통을 위하여

 

I. 자연과 인간

자연을 황폐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만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지금의 인간 문명은 결코 낙관적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듯 하다. 지구온난화를 불러온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는 지역과 문화, 인종과 국가를 떠나 전 세계적으로 인류의 당면과제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자연환경 파괴로 위기에 직면한 인류에게 자연미술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일은 시대 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미술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는데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를 주도하고 있는 야투그룹은 그동안 환경문제를 작품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연과의 독특한 예술적 관계를 설정해온 자연미술운동은 그동안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제안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예술 활동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하는 창의성이 자연의 섭리를 반영한다는 사실과 연계하여 ‘인간의 자연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았다. 또한 자연과 직접적인 만남을 추구해온 한국의 자연미술운동이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미학적 담론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측면들을 살려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II. 미술상태로서의 자연미술

인간의 자연성은 인간성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본성과 통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내부에 이러한 속성이 없다면 자연과의 소통은 불가능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의 창의적 표현 속에서 생명력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은 예술작품이 생태적 생명을 취하고 있지는 않으나 작업과정 속에서 발휘된 인간의 자연성이 작품 속에서 생명력 있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며, 특정한 부분을 지목해서 보더라도 완성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자연은 미적 판단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한다. 숲속의 풍부한 변화와 깊이를 만들어내는 수목들의 어느 부분을 바라보더라도 아무런 어색함이나 부족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작위적인 시도와 다른 생성원리가 자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의적 활동의 결과물을 통해서도 자연 상태와 같은 독립적 완성도를 느끼게 될 때가 있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작품 스스로가 작업을 이끌어가며 마침내 작가 자신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는 독립된 작품으로서 완성되는 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절로 그렇게 움직이는 자연과 유사한 감흥을 제공하곤 한다.

자연의 섭리와 창작활동을 이끌어가는 창의성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자연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데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창조적 힘을 각기 ‘자연의 자연성’과 ‘인간의 자연성’이라는 말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의 탁월한 예술가들이 공유했던 이 창조정신은 자연미술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미술형식을 통해서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 전통적인 미술에서의 자연은 제작과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지만 자연미술에서는 제작과정에 뿐 만 아니라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자연미술은 자연공간을 단지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예술적 의지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아 움직인다. 따라서 자연미술은 자연으로 인해 작업이 완성되고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자연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서로를 내맡김으로서 자신을 생성시켜나가는 자연의 자연성과 인간의 창작의지가 만나는 그곳에서 일종의 ‘미술상태’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본인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자연미술은 山川草木 뿐 아니라 자연생태작용의 환경이 되는 빛, 바람, 소리, 색깔, 그리고 자연 현상 속에 내재된 질서 모두와 관계하며, 자연은 인간의 접근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품에 참여한다. 자연과 더불어 작업하기 위해서는 실내작업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즉 기술적, 감각적 손재간을 바탕으로 하는 기존의 회화 제작 방식과는 다르며 야외공간에 인위적 구조물을 들이밀면서 개념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야외설치와도 거리를 유지한다. 자연미술은 자연을 단지 대상과 재료로만 다루지 않으며, 자연을 정의하거나 해석하지도 아니한다.

자연현장에서 나무와 그림자, 풀, 돌, 파도 등을 통해 발생되는 아이디어는 자연과 나와의 연결루트를 만들고 이런 연결 상태(방식)가 곧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생각이 시각적 개념적 결합을 이루며 자연과 인간 사이의 ‘미술상태美術狀態’가 된다. 이러한 결합 상태는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이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하거나 자연재료를 가지고 설치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나타나는 양상과는 사뭇 다른 방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쪽이 또 다른 한 쪽을 완전히 장악하거나, 두 가지의 특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머금듯 하나로 존재하면서도 각각의 특질을 서로 훼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자연과 인간의 행위가 서로 맞물린 구조를 가짐으로써 主와 客의 구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하는 생성구조를 지닌 것이 자연미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인간의 예술적 의지가 자연에 대해 일방적 해석을 가함으로서 빠지게 되는 허위의 늪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 무한으로 이어지는 세계와 연결됨으로서 예술작품의 의미가 극대화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자연미술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예술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연과 인간의 예술적 균형을 추구하는 자연미술이 인간의 삶의 태도를 바꾸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온 인류의 역사를 통해 예술가들이 시대의 변화에 제일 먼저 반응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금의 자연미술운동은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상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표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III.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자연미술

자연미술도 다른 미술운동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며. 평면을 떠나 現實物과 오브제를 다루었던 현대미술의 방법론과, 풍경화의 실재 현장인 자연 속에서 작업했던 대지예술 등에서 그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과정과 행위, 그리고 사진 등의 매체를 이용한 개념적 표현 방법으로부터 자극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1981년 창립되어 활동한 야투그룹의 자연미술가들은 현대미술의 복잡한 이론을 전제로 자연과 만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의 현대미술 작가들처럼 ‘미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자기규정의 문제를 가지고 자연을 대했었다면 결국 미술을 위해서 자연을 도입하는 방식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연을 작품 안으로 받아들임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 사이를 왕복하는 인간의 자연성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자연의 자연성’과 ‘인간의 자연성’이 미술이라는 형식 속에서 직접 만나되,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서로 작용하는 ‘자연.미술’를 경험하였다.

  반면에 자연에서 작업하는 많은 작가들이 자연 속에 작품을 밀어넣는 방식을 취함으로서 ‘자연미술 Nature Art’이 되기보다는 ‘자연속의 미술 Art in Nature’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의 적절한 ‘관계 맺음’이 없이 단지 자연물만을 이용한 작업은 자연물 설치에 머무르게 되고, 여기에는 자연과 작품이 실질적으로 함께 작용하지 않으며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 의식의 깊은 작용이 결여되어 있다. 즉, 자연미술의 미적 가치는 자연과의 관계맺음을 위한 충분한 사유 작용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서로간의 소통을 위한 통로를 확보했을 때 찾아지는 것이며, 여기에서 사유 작용이란 자연을 관리하고 삶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일방적 정신작용과는 다른 사유작용이며 그것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흘러나온다고 할 수 있다.

자연미술가들의 작업은 살아있는 자연 속에 자신의 주거지를 만들고 자연 상태의 도구들이나 생생한 자연현상을 이용해 삶을 영위했던 원시 인류의 생활 방식을 작업에 반영함으로서 인간문명 이전의 삶의 원상을 회복한다. 따라서 자연미술은 현대인의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삶의 본향을 일깨워냄으로서 잊혀진 미적정서를 환기 시키는 것이다.

자연미술은 관람자들로 하여금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표현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현상은 작가와 자연과의 소통이 관람객에게 전달되어지는 과정이며 자연미술이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회복을 위한 인간의 태도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IV. 자연미술 미학의 선명성을 위한 질문

  최근 들어 한국의 지역 곳곳에서 자연미술 경향의 미술제들이 열리고 그에 따라 자연 속에서 작업하는 작가도 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사들은 하나의 미술운동으로서 보다는 이벤트성 행사의 색채가 짙다. 이러한 움직임을 일종의 유행을 따르는 아류거니...하고 무시하기에는 여러가지 짚어봐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아직 명확한 자연미술의 미학적 영역을 확보하기도 전인데 불분명한 성격의 자연미술제들이 난립함으로서 정작 자연미술의 고유한 성격이 희석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야투를 중심으로 한 자연미술운동이 파괴력 있는 힘으로 작용하지 못한 것은 지역미술운동을 소홀하게 여기는 미술계의 풍토가 한 가지 원인은 될 수 있으나 외부로만 그 탓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자연미술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의 소박한 제작태도가 주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자연물을 이용한 조각적 상상력에 머무르는 작업은 자연미술의 특성을 살려내지 못하며, 맹신적 자연친화 정서를 바탕으로 한 막연한 작업들은 사람들의 시각과 정신 사이를 파고드는 예술성을 갖출 수 없다. 특히 자연물을 가지고 결국 눈 감각에만 호소하는 작업들이나 모방적 범주에서 미술적 의미를 찾는 일은 자연미술을 다시 전통적 미학의 영역으로 후퇴시키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갖게 한다. 자연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이 미학적 논점을 또렷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위와 같은 작품들과의 구별 없이 자연미술계가 형성되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는 그간의 성과를 분석하면서 그 나아가야 할 방향을 숙고해야하는 시점에 왔다. 자연미술의 여러 가지 혼란스런 문제들을 중심으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자연미술의 미학적 성격을 선명하게 세워나가지 못하면 한국의 자연미술은 세계자연미술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예술세계를 열기위한 一步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미술을 열어가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한걸음의 전진은 창조적 사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또한 알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동료 자연미술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봄으로서 창조적 노선투쟁을 제안하고 싶다.  

자연미술은 단지 자연물(자연)을 이용하는 미술인가?

이 질문은 자연미술의 미학적 영토가 어떻게 독립적이며 다른 미술과 어떤 점들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개념적으로 말이 되면 미술이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하다. 또한 자연미술의 방법론이 회화, 사진, 영상 등 실내작업으로의 확산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이기도하다. 한국의 자연미술운동의 중심에서 역할을 했던 야투가 과거의 성과를 진화시키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고 있거나 도리어 과거의 미술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너무나 아쉬운 일이라 할 것이다.

 

V.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 : 소통

오늘날 자연은 인간의 무분별한 횡포에 대항적 반응을 하고 있다. 이제라도 자연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인간의 태도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전 인류의 불행은 생각보다 빨리 닥쳐올 것이다. 자연은 단지 말이 없을 뿐, 인간의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우리의 생존 환경을 변화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윗글에서 나는 인간에게 내재된 자연성을 통해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인간과 자연 속에 내재하는 이 자연성을 매개로 자연과 새롭게 만나고, 자연과의 긴장감 있는 균형을 이끌어냄으로서 자연미술은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소통을 위한 예시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제 자연미술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 형식을 미술로 풀어냄으로서 미술사의 한 장을 새로 쓰는 창의적 소명을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  

   각각의 삶의 방식이 존중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삶의 통일성을 상실함으로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판단할 준거를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삶의 통일성과 보편적 가치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다시 생각해야하며 이를 통해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흘러들어가 왜소해진 미술을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과 자연이 서로의 존재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자연미술 작품들이 이 세계의 미래를 설계할 새로운 정신에 풍부한 영감과 에너지를 공급하게 되기를 바란다.

인류의 출현 이후의 모든 문명의 역사를 이끌어 내고도 여전히 모자람이 없는 자연과, 끊임없는 철학적 정의와 과학적 확인을 거듭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이 신비로운 자연과의 예술적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신께서 부여한 인간 존재의 정당한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2007. 9

2007 금강자연미술프레비엔날레 도록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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